| | | ▲ A지구 성벽 내 인골 출토 |
[프라임경북뉴스= 김진한 기자] 경주 월성(사적 제16호)에 대한 정밀 발굴조사 중 ▲ 서쪽 성벽의 기초층에서 제물로 추정되는 인골 2구가 출토되고, ▲ ‘소그드인’으로 추정되는 터번을 쓴 토우가 나오고 ▲ 병오년(丙午年) 간지가 정확하게 적힌 목간이 발굴된 것으로 확인됐다.
문화재청 국립경주문화재연구소는 2015년 3월부터 진행 중인 경주 월성 정밀발굴조사의 중간 조사결과를 16일 월성 발굴현장에서 공개한다고 밝혔다.
참고로, 경주 월성 조사구역은 총면적 22만 2천㎡규모로 편의상 A, B, C, D 등 총 네 지구로 나뉘어 있다. A지구(월성 서편지구)는 2015년 6월 발굴조사가 시작된 곳인데, 이곳의 발굴조사를 통해서는 서쪽에 있는 성벽이 5세기에 처음으로 축조되었고 6세기에 최종적으로 보수되었던 사실을 확인했으며, 문이 있던 자리는 이미 유실되었다는 사실을 밝혀냈다.
월성 성벽은 훍으로 만든 토성(土城)이며, 성질이 다른 흙을 서로 번갈아 가면서 쌓아올리는 성토(盛土) 기술로 축조했다. 성벽 최상부에는 사람 머리 크기 만한 돌이 4∼5단 가량 무질서하게 깔려 있었다. 이는 흙이 아래로 흘러내리는 것을 막기 위한 기능으로 보이며, 월성의 특징 중 하나이다.
월성 서쪽에 있는 서성벽을 조사한 결과, 축조연대는 5세기 전후로 판단되며, 국내에서 최초로 성벽을 쌓는 과정에서 사람을 제물로 사용한 제의의 흔적이 확인되었다. 인골은 성벽을 본격적으로 쌓기 직전인 기초층에서 두 구가 출토되었다. 한 구는 정면으로 똑바로 누워 있고, 다른 한 구는 반대편 인골을 바라보게끔 얼굴과 한쪽 팔이 약간 돌려져 있다. 두 구 모두 얼굴 주변에 수피(樹皮, 나무껍질)가 부분적으로 확인되었다.
이처럼 성벽을 쌓는 과정에서 인골이 확인된 국내 사례는 월성이 최초이다. 주거지 혹은 성벽의 건축과정에서 사람을 제물로 사용한 습속은 고대 중국(BC 1,600∼1,000경, 상(商)나라)에서 성행하였던 것으로 알려져 있다. 우리나라에서는 지금까지 제방이나 건물의 축조와 관련된 인주(人柱) 설화로만 전해져 오다가 이번에 그와 같은 사실이 고고학적으로 확인된 셈이다.
현재는 발굴된 이들 인골을 대상으로 자연과학적 연구를 하고 있는데, 예를 들어 인골의 성별·연령 등을 확인하기 위한 체질인류학적 분석과 DNA 분석, 콜라겐 분석을 통한 식생활 복원, 기생충 유무 확인을 위한 골반 주변 토양 분석 등을 하고 있다. 참고로, 뼈는 당시 사람들의 체질적 특성이나 인구 구조, 질병 및 건강 상태, 식생활, 유전적 특성 등을 밝혀낼 수 있는 중요한 자료다.
앞으로 이 인골에 대한 연구 결과가 나오면 당시 사람들의 다양한 생활상을 더 자세히 알 수 있을 것으로 기대된다.
한편, 월성 북쪽 면에 길게 늘어서 있는 해자의 경우 2015년 12월부터 지금까지 내부 정밀보완조사가 진행되어왔는데, 조사 결과 해자가 약 500년 동안 수혈해자에서 석축해자로의 변화를 거치며 지속해서 사용되었다는 사실이 확인되었다.
수혈해자는 월성 성벽을 둘러싼 최초의 해자로서, 성벽 북쪽에 바닥층을 U자 모양으로 파서 만들었으며, 해자 가장자리가 유실되거나 이물질을 막기 위한 판자벽을 세웠다.
석축해자는 수혈해자 상층에 석재를 쌓아올려 조성하였으며, 독립된 각각의 해자는 입·출수구로 연결되어 있다. 해자는 시간이 가면서 다시 쌓거나 보강하면서 폭이 좁아졌으며, 내부 토층별 출토 유물을 분류해본 결과 수혈해자는 5∼7세기, 석축해자는 8세기 이후 사용된 것으로 판단된다.
월성 성벽과 해자의 조성 순서를 확인한 결과, 성벽을 먼저 쌓고 이후 최초의 수혈해자를 팠던 것이 확인되었다. 이후 성벽과 해자를 다시 쌓거나 보수하는 과정을 거치면서 성벽 경사면에 해자의 석축호안을 쌓는 등, 유기적으로 축조했던 것을 확인할 수 있었다.
해자에서 출토된 흙으로 형상을 빚은 토우(土偶)들이 여럿 출토됐는데, 모양은 사람과 동물, 말 탄 사람 등 다양하지만, 이중 터번을 쓴 토우가 나와 주목할 만하다.
이번 터번 토우는 눈이 깊고, 끝자락이 오른쪽 팔뚝까지 내려오는 터번을 머리에 두르고 있다. 팔 부분이 소매가 좁은 카프탄을 입고 있으며 허리가 꼭 맞아 신체 윤곽선이 드러나고 무릎을 살짝 덮은 모양인데, 당(唐)나라 시대에 호복(胡服)이라고 불리던 소그드인 옷과 모양이 유사하여 페르시아 복식의 영향을 받은 소그드인으로 추정해 볼 수 있는 근거가 된다. 6세기 토우로써 추정되기 때문에 현재까지 출토된 소그드인 추정 토우 중 가장 이른 시기로 판단된다.
월성 해자에서는 목간도 총 7점 나왔다. 이들 목간을 통해 ▲ 목간 제작 연대와 해자를 사용한 시기 ▲ 신라 중앙정부가 지방 유력자를 통해 노동력을 동원·감독했던 사실 ▲ 가장 이른 시기의 이두(吏讀)사용 사실을 확인했다.
‘병오년(丙午年)’이라고 적힌 목간은 월성해자 출토 목간 중 정확한 연대가 최초로 확인된 것으로, 병오년은 60년 만에 한 번씩 돌아오기 때문에 법흥왕13년(526년)이나 진평왕8년(586년)으로 볼 수 있다. 이는 월성의 사용 시기를 확정할 수 있을 뿐 아니라, 6세기 신라의 활발한 문자활동도 증명해준다.
지방민에게 주어지던 관직을 의미하는 ‘일벌(一伐)’, ‘간지(干支)’이라고 적힌 목간은 노동을 의미하는 ‘공(功)’과 함께 연결되어 왕경 정비 사업에 지방민이 동원되었고 그들을 지방 유력자가 감독했다을 보여준다. 이는 6세기 동안 이루어진 진흥왕12년(551년)의 명활산성 축성, 진평왕13년(591년)의 남산신성 축성 등의 큰 공사에 신라 중앙정부가 지방에 행사한 통제력을 가늠해볼 수 있는 근거가 된다.
또 다른 목간에 적힌 글자인 ‘백견(白遣)’은 이두의‘???고’, 즉‘사뢰고(아뢰고)’라는 의미이며, 신라 왕경 내에서는 가장 이른 시기의 이두로 판단된다.
이 외에도 삼국사기(三國史記)에서 확인되지 않은 새로운 관직명인 ‘전중대등(典中大等)’, 유학(儒學)이 퍼져 중국 주(周)나라 주공(周公)을 모방하여 이름을 지은 것으로 보이는 ‘주공지(周公智)’, 당시의 동물과 식생활을 추정할 수 있는 ‘닭(鷄)’과 ‘꿩(雉)’ 그리고 ‘안두(安豆)’등의 글자가 적힌 목간도 확인되었다.
이외에도 동물뼈, 식물유체, 목제유물 등 다양한 자료들이 해자에서 출토되었다. 동물뼈는 돼지, 소, 말, 개가 가장 많이 출토되었다. 특이한 것은 곰의 뼈가 출토된 것이다. 곰은 신라 시대 유적에서 최초로 확인된 동물유체로서, 유입과정과 사용례에 대해서는 앞으로 더 연구가 필요하다. 또한, 멧돼지나 개의 머리뼈를 절단·타격한 흔적, 작은 칼과 같은 도구로 다듬은 흔적에서 도살과 해체 작업을 엿볼 수 있었다. 소의 어깨뼈에 새긴 동그란 흔적을 통해 뼈 자체를 사용하고자 했던 것을 확인할 수 있다.
식물유체는 식물의 줄기와 잎, 열매, 씨앗 등으로 분류된다. 씨앗류가 가장 많이 출토되었으며, 그중에서도 특히, 가시연꽃(산림청 지정 희귀식물) 씨앗이 가장 많다. 환경에 민감하게 반응하는 식물로, 당시 해자 내 물의 흐름, 깊이, 수질 등을 추정할 수 있다. 또한, 곡류, 채소류, 과실류의 씨앗이 양호한 보존 상태로 확인되고 있어 당시 식생활을 복원할 수 있을 것으로 기대된다.
목제유물은 빗, 국자, 목제그릇, 칠기(漆器:옷칠) 등의 생활도구, 나무와 나무를 잇는 건축재료 등 다양하다. 특히, 이번에 출토된 얼레빗은 손칼(刀子), 작은 톱 등으로 정교하게 제작한 흔적을 찾을 수 있어 제작 기법 뿐 아니라 제작도구를 추정할 수 있는 중요한 자료다. 또한, 검은 색과 붉은 색으로 채색하고 손잡이를 나무못으로 부착한 목제품과 붉은 색으로 채색된 목제품 등도 출토되었다.
문화재청 국립경주문화재연구소는 신라 천 년 궁성인 월성의 체계적 복원을 위한 철저한 고증연구와 학술 발굴조사를 진행할 계획이며 아울러 발굴조사의 새로운 유형을 만들기 위해 정기적인 성과 공개, 대국민 현장설명회, 사진 공모전, 학생들을 위한 체험 프로그램 등을 마련하여 국민과 함께 발굴성과를 공유하고 꾸준히 소통할 것이라고 밝혔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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